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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경북 군위군 군위읍의 낙동강 둔치에서 인근 지보사에서 수행중이던 문수스님이 바로 이 소신공양을 결행했다.
지난 86년 출가한 스님은 1998년 중앙승가대 학생회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근년에는 조용히 수행에만 전념한 분이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지난 3년간 산문을 떠나지 않고 용맹정진을 거듭해 왔다고 한다. 그리고 산문을 나선 첫날, 그가 한 일은 바로 스스로의 몸을 태우는 것이었다.
불에 탄 그의 몸 옆에서는 친필 유서가 발견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 스스로의 몸을 태운다는 것이 어떤 건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영원히 알고 싶지 않다.
인간에서 미물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모두 기를 쓰고 죽음을 피하려 하고, 죽음이 언젠가 오더라도 가장 편하고 고통없는 방법으로 맞기를 갈망한다. 소신공양은 이런 생명의 본능에 극적으로 반하는 것이고, 나아가 거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거다. 단지 목숨을 내놓는 것만이 아니라 생명체로서 상상 가능한 최악의 두려움과 고통을 스스로 선택하여 이를 직시하고, 종내에는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부처님께, 살아있는 중생들을 위해 바치는 거다.
이를 결행하는 문수스님의 결의가 어땠는지는 그의 법구가 강 둔치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헤아리게 된다. 몸에 불이 붙고 고통스럽게 되면, 제 아무리 강인한 인간이라 해도 명분보다는 살고 싶은 본능이 우선하게 마련이다. 필자는 오래전 분신의 광경을 직접 목격한 친구에게서 그것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대부분의 인간은 불을 붙인 즉시 공포와 고통에 몸부림치며 살려달라고 외친다. 자신을 태울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비난 받을 일이 아니라 극히 인간적인 것이고, 그러기에 더욱 비참하다.
그러나 문수스님은 강물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거기에 뛰어들지 않았다. 불이 붙은 채 강가로 달려온 것이 아니다. 바로 옆에 휘발유 통과 유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결의를 시험해 보려 했던 걸까. 생존과 육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유혹을 목전에 놓아 둔 채 그것을 이겨냄으로써 진정한 소신공양의 뜻을 이루려고 한 걸까.
그 답은 스님만이 알고 있을 거다...
원칙적으로는 어떤 형태의 자살도 권장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남을 위해서 불태워 버리는 것에는 다른 자살과 구별되는 한가닥 굵은 아름다움이 있다는 점,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그의 소신은 어떤 관객도 하나 없이, 어떤 과시의 흔적도 없이 온전히 혼자만의 자리에서 외롭게 결행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죽음은 작년의 누군가와도 닮아 있다.
이 강인한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은 살아있는 우리들의 한 가닥 예의일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저 친필 유서에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다만 유서의 수신인인 가카와 그 일당은 왠 시골 땡중이 미친짓했다고 코웃음 칠 것이 분명하니 우리가 직접 하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지금 이 순간 너무도 명확하다. 스님이 어제라는 날자를 선택한 것이 과연 우연이었겠는가? 시골에서 수행만 하고 있다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전혀 몰랐겠는가?
소신공양이라는 무서운 결의를 보여준 스님께 초라한 우리가 당장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다. 제 아무리 게으른 정신과 무거운 엉덩이를 가졌다 한들.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죽어가는 것에 대한 한 가닥 연민이 있다면.
추신 1: 현재 조계사 경내에 분향소가 마련되어 조문을 받고 있다. 가능한 분들은 꼭 가서 그 뜻을 기리기 바라고, 함께 조계종의 향후 대응을 주시하자. 위 사진속의 인물은 '강남명진 강북수경' 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 수경스님이다.
추신 2: 어제 밤 메인 뉴스에서 SBS는 스님의 소신공양 관련 뉴스를 전혀 다루지 않았고 MBC는 30분대에, KBS는 40분대에 약 10초간 단신으로 편성했다. YTN은 저녁 8시부터 속보로 보도했다.
기억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