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연평도 도발로부터 8일이 지났습니다. 날짜를 세는 게 무의미할 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우리 사이에서 돌고 돌았습니다. 북한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우리는 왜 그렇게 당할 수 밖에 없었는지, 앞으로 북한은 어떻게 할 것인지,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미디어들은 난리입니다. 미디어들이 가장 존재감을 발휘할 때가 바로 이런 때가 아닐까요. 지난 일주일 동안 미디어들이 쏟아놓은 이야기들은 차고 넘칩니다. 수많은 전문가들과 정치인들이 나와서 자신들이 아는 것, 자신들이 믿는 것을 쉴 새 없이 떠들어 댑니다. 한쪽에서는 무자비한 응징을 부르짖고, 한쪽에서는 항구적인 평화를 갈구하는 목소리를 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고 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조금씩 정리해 나갑니다.
메이저 방송사들은 일제히 똑같은 주제로 토론을 펼쳤습니다. 국회의원, 교수, 전문가, 다양한 오피니언 리더들이 방송에 출연해서 자신들이 아는 한도 내의, 자신들이 추측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이야기들을 풀어냈습니다. 모두 다 그럴 듯한 말들이었습니다. 수준 높은 정보에 근거한 정교한 분석과 연구가 바탕이 된 이야기들이었을테니, 당연히 그럴 듯 했겠지요. 다채로운 각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의 향연들. 그런 이야기들의 반복을 우리는 수없이 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수없이 접하겠지요.
북한이라는 존재가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북한을 우리가 감싸 안아야할 동포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우리와 전쟁을 멈춘 지 60년도 지나지 않은 철천지 원수라고 부릅니다. 개중에는 6.25를 통해서 북한군에게 가족 중의 누군가를 잃기도 했을 것이고, 피난 통에 가족이 남과 북으로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다른 이는 그들의 슬픔과 그리움을, 그들의 분노와 증오를 지켜보며 자랐을 것이고, 운 좋게 6.25를 그저 역사책 속에서만 존재하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대상을 바라보는 이토록 다채로운 감정들이 하나의 땅에서 뒤섞여 큰 울림을 자아냅니다.
저번 주 방영한 100분 토론이었을 겁니다. 역시 많은 전문가들과 정치인이 나와서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시청자 의견을 듣는 코너였습니다. 연결이 된 사람은 연평도 근해에서 꽃게잡이를 하는 어선의 선장이었습니다. 사회자는 그에게 연평도가 공격당하던 당시 상황에 대한 목격담을 요청했습니다. 그가 풀어놓은 생생한 목격담이 끝나고, 사회자는 그에게 별다르게 하고 싶은 말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털어냈습니다. 그의 말은 단순했습니다.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생활근거지는 연평도 근해이고, 그 곳에서 꽃게잡이를 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습니다. 그냥 살던대로, 원래대로 살게 해달라는 것이 목격담 이후에 이어지는 맺음말이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나자 토론회의 패널들이 앞서서 털어놓는 이야기들이 공허하게 들렸습니다. 그와 더불어, 연평도 바깥에서 울려 퍼지는 수많은 말들도 공허하게 들렸습니다. 복수, 화해, 평화, 전쟁...
북한의 공격 이후 연평도를 빠져나온 주민들은 인천의 한 찜질방에서 모두 기거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6.25 이후 처음인 것이 분명한 피난민들의 모습. 아주 단순한 질문입니다. 북한의 공격을 받은 뒤 주민들이 연평도를 빠져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살기 힘들어서겠죠. 똑같은 질문을 다시 던지겠습니다. 북한의 공격을 받은 뒤 주민들이 연평도를 빠져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살기 위해서겠죠.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 살기 위한 목적을 찾습니다. 대의, 이익, 철학. 갖가지의 것들을 위해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 그 자체를 살기 위해 살아갑니다. 거기에 조금 덧붙인다면, 행복한 삶. 나의 행복한 삶, 내 가족의, 내 친구의 행복한 삶. 연평도에서 살아가던 이들도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각자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정착하게 된 그 곳에서 그들은 제 각기의 행복을 찾으면서 삶을 살아나갔겠지요. 그렇게 행복을 찾던 삶의 터전이 80여발의 포탄에 의해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는 불안의 땅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연평도의 주민들이 겪었던 공포를 우리가 언제고 겪을 수도 있다는 걱정. 그 걱정을 덜어내기 위한 저마다의 생각들, 목소리들이 나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평도의 주민들이 언제고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 아닌, 말초적인 분노, 말초적인 공포에 의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자제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은 이들의 모습에 분노하며 그 분노를 김정일, 김정은에게 쏟아낼 수도 있겠지요. 이런 상황까지 몰고 간 정부에 대해 분노를 할 수도 있겠지요. 그 이전에 이런 대결구도를 만들어놓은 주변국들을 생각하며 분노를 할 수도 있겠지요.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이 터질 듯 안절부절하며 공포를 쏟아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삶을 추스르는 것 조차 막막해 보이는 이들의 마음을 앞설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외치는 평화, 전쟁불사라는 목소리가 그들의 삶에 대한 의지, 행복한 삶에 대한 의지를 앞설 수가 있을까요.
좋습니다. 누군가는 그들이 걱정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평화를 이야기하고, 또는 그런 싹을 애당초 뿌리뽑기 위해서 전쟁을 이야기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좋은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그 단어들에는, 적어도 표면에 드러난 그 의미에는 삶의 흔적이 그렇게 보기 좋게 드러나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무조건적인 전쟁을 반대합니다. 또한 무조건적인 평화도 반대합니다. 무조건적인 전쟁에는 피폐한 삶과 죽음만이 존재하고, 무조건적인 평화에는 굴욕적인 삶과 복종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상대에 따라 그들과 화친을 할 것이냐, 싸울 것이냐는 선택을 현명하게 판가름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우리가 속한 집단, 집단 안의 수많은 삶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깔려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저기 울려 퍼지는 수많은 언어의 잔치들에서는 그런 고민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단순한 반사작용에 의해서 북괴를 때려잡자는 말을 하거나, 일단 달래고 보자며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그 와중에 연평도의 주민들은 찜질방에서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어디서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정부는 그들에게 삶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연평도에 다시 들어와서 살면 보상해주겠다, 연평도의 한 초등학교에 피난용 숙소를 만들어 줄 터이니 거기서 살라. 정부가 연평도 주민을 향해 던지는 삶에 대한 고민이란 딱 그 정도입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고, 지금 연평도 주민의 삶보다 더 가혹해질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의 삶이 조금이라도 희망을 찾으려면 그들의 삶이 어떻게 희망을 찾는지를 꾸준히 지켜봐야 합니다. 그것이 그들을 살게 하고, 또한 우리를 살게 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