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글은 산벗 산행후기에서 함께 입력된 아사달의 봄님의 글입니다. |









두물머리는 서로 다름이 같음으로 태어나는 곳이다
금강산 일 만 이 천봉 그 어느 구석에선가 돌 틈을 비집고 샘솟아 굽이굽이 물을 더하고, 세월을 더해 흘러온 북한강의 물주기와 백두대간 허리쯤 태백의 심산유곡에서 발원한 남한강의 물줄기가 영겁의 무게를 더해 마침내 조우하는 두물머리에는 오늘도 시간이 더디 흐른다. 급할 것 하나 없는 유유자족함의 물머리엔 간간히 날아가는 철새의 날개짓도 한가롭기 그지없어 멈춘 듯이 흐르고, 흐르는 듯 멈춰버린 그 고요함이 일품이다.
인간의 오만함과 편협함이 “너는 북이고, 나는 남이다” 이렇게 줄을 긋고 담을 세워 하나였음을 둘로 나누고서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아옹다옹한다지만 금강산의 물과 태백산의 물은 다툼이 없다. 그 품에 무엇을 품었는지 따지지도 않는다. 네가 그리됨은 그 뜻이 있을 터이고, 내가 이리됨은 그 이유가 있겠지 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두 물줄기 합방하는 두물머리는 언제나 고요하다. 내가 먼저고 너는 나중이다 하는 따위의 다툼이 그 품에 있다면 아마도 뇌성벽력이 일어도 수천 수 만 번은 일어났을 게다. 하지만 두물머리의 백미는 고요함이다.
모순의 극치는 어쩌면 참이다
운길산 야트막한 그 산 중턱에 아담하게 자리한 절이 있다. 두물머리를 조망하는 데에는 최고의 위치에 있다는 절, 수종사다.
숨을 헐떡이다 땀이 좀 난다 싶으면 다다르는 아기자기 옹기종기 야트막한 산에 어울리는 조그만 절. 억불숭유를 통치의 근간으로 삼고 불교를 탄압하던 조선왕조의 그 칼바람 같은 시대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한양으로 돌아오던 세조가 하룻밤을 묵은 곳이 지금의 수종사 터란다. 잠을 청하던 세조가 지축을 흔드는 종소리에 놀라 잠을 깨 그 소리의 원인을 조사했는데 바위틈 조그만 동굴에 18나한이 있고 그 동굴에서 똑똑 떨어지던 물소리가 지축을 흔드는 종소리였단다. 하여 절을 짓고 이름을 수종사라 이름 하였다 는데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진보란 멈춤을 거부한 모든 것이다
진보란 무엇인가? 가끔 생각을 하게 된다. 수종사에서는 공양을 차로한다. 두물머리가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삼정헌의 탁 트인 전망과 함께하는 차향은 말로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찻잎에서 번지는 향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시야에 들어오는 두물머리의 풍경은 뭐랄까? 복숭아꽃잎 두둥실 흘러가는 무릉도원이 어쩌면 여기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게 만드는 곳, 그래서 그 많은 시인묵객이 두물머리와 수종사를 칭송했는지도 모른다. 풍경소리 나즈막히 뎅 뎅 데~~엥 울리는 삼정헌의 다향은 시공을 초월한 끝 모를 고요함이다. 그래서 겸재도 한양8경의 시발점을 두물머리에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겸재가 누구인가? 중국의 관념산수화에 사로잡힌 당시의 화풍에 혁명적인 화풍을 개척한 진정한 미술사의 진보주의자가 아닌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관념적 풍경, 다시 말하면 스승의 화풍을 답습함에 머물고 그 속에서 자리다툼에 골몰하던 조선의 미술사에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화풍을 스스로 만들어낸 멈춤 없는 진보주의자가 아닌가 말이다. 그 겸재가 사랑하던 유수8경의 첫 1경이 두물머리란다. 반역의 역사를 만들어낸 조선의 왕이 수종사를 창건하고 그 수종사에서 두물머리의 아름다음을 조망하던 진보주의자 겸재 정선. 강물은 그 숱한 역사의 나날을 까발리지도, 자랑하지도 않고 오늘도 그저 조용히 흘러만 간다. 다만 멈춤이 없이.....!!!
상채기는 스스로 몸에 새기는 역사다
많지도 않은 일곱 명의 ‘산벗’이 운길산을 오른다. 그것도 선두에선 일진과 후미에선 이진으로 나누어 올랐다. 본디 선두와 후미를 나누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게으름뱅이 나 같은 사람이 있어 출발시간에 맞추지를 못해 벌어진 헤프닝이기는 하다만 어찌되었거나 그렇게 산행이 시작되고 뒤에 처진 미사리님과 나는 선두에선 다정무심과 그 무리를 따라잡으려 헐레벌떡 산길을 탔다. 운길산역에서 하차해 바라본 운길산은 조그마한 산이었지만 앞선 일행을 따라잡기 위한 후미의 발걸음은 바쁘기 마련이고 숨 가쁘기 마련이다. 헐레벌떡 턱까지 치미는 숨은 곧 죽을 듯이 힘겹고 아프다. 그렇게 이십여 분 치달은 산길에서 저만치 시민광장 이쁘고 고운 산벗의 비표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집나간 마누라의 뒷모습을 보는 듯이 마음이 복잡하다. 머리채를 휘잡아 뽀뽀라도 진하게 나누고 싶은 심정이랄까......^^
그렇게 수종사를 몇 미터 앞둔 거리에서 일행을 만나 삼정헌에서의 차향을 맡는 호사까지. 거기까지는 운길산의 산행은 말 그대로 길한 산행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수종사 허리를 휘 감돌아 예봉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에서 마주하는 칼바람에서 나는 비릿한 피 냄새를 맡았다면 거짓말일까.
하늘엔 구름 한 점이 없었다. 쨍한 시베리아 고기압이 만들어내는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참으로 좋았다. 날은 살을 저미는 듯이 날카로웠지만 쏟아지는 햇살은 그만큼 푸르고 눈부셨다. ‘그래 겨울 산은 이런 맛에 하는 거야!’ 절로 흥이 흘러나오고. 하지만 배낭에서 덜그럭 덜그럭 소리가 요란하다. 좀 과장을 하자면 그랬다. 북풍한설이 불어오는 날이 아니라면 배낭에서 나는 소리는 출렁출렁 이었다.
날이 춥다 하고 산이 나지막하다 하지만 그래도 목이 타고 숨도 타들어 가면 물이 그리운 게 인지상정이지. 베낭의 옆꾸리에 차고 다니는 물을 찾는다. 뚜껑을 열고 입을 벌려 시원하고 달콤한 물을 털어 부었다. 하지만 물이 없다. 아니 분명 물통에는 물이 한 가득이다. 하지만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것은 그저 마른 침이다. 물통의 물은 어느새 얼어붙어 서걱서걱 소리를 낼 뿐 흐리지 않는다.
먹는 둥 마는 둥 점심을 해결하고 둘레길이라 칭한 길을 걷는다. 바람이 심상치 않고 하늘가에는 부스러기 눈마저 우리를 위협한다. 마른 눈은 눈이 아니라 얼음이다. 그만큼 춥고 메말라야 눈이 부스러져 가루로 흩뿌려진다. 내 마음도 가루로 부서져 내린다. 나도 상관없고 유노사랑님이나 쏘피님 정도만 되어도 상관이 없다. 뉘엿뉘엿 해는 저물고 갈 길이 멀기는 하다만 그래도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산에 첫발을 내디딘 쉰마님이 걱정이다. 아장아장 조심스레 걷는 아이의 발걸음이 쉰마님의 발걸음에서 느껴진다. 처음이란다. 뒷동산도 정상을 밟아본 기억이 없다는 말씀에 가슴이 철렁하다. 아마도 몸살은 필수 코스가 아닐까. 내일 아침이 버겁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래도 나는 겨울의 칼바람이 좋다
여기저기서 말들이 춤을 춘다. 어두워지는 산 그림자가 짙어 질수록 그 말의 향연도 그 험함을 더한다. 하지만 어찌하랴. 말 많아 좋아질 일이라면 나도 침 튀기면서 그 춤사위에 흥을 더하겠다만.
좀 거창하게 이야기 하자. 도전 없고, 고통 없는 발전은 없다. 고통 없이 뭔가가 나아지리라 믿고 그렇게 행하는 것은 눈가림이다. 근본적인 변화는 있을 수가 없는 게다. 앞트임을 하고 턱을 깎는 고통을 겪었다 치더라도 그게 내 자식에게 유전되는 근본적 변화는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몇 십 년 전에 터득한 자전거를 탄다던가 하는 따위의 뼈에 새기는 변화는 그 세월이 무겁다 해도 변함없이 그 순기능을 발휘하는 게 통상적이다.
뼈를 저미는 추위에 맞서 한발 한발 내딛는 걸음걸음에서 나는 희망을 보곤 한다. 몸서리치게 하는 추위는 무섭고 힘들지만 한번 두 번 겪다보면 견딜만하다. 겪어보지 않으면 그 추위 앞에 나는 늘 무기력하게 마련이다. 아예 집밖으로 나설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한번만 나서보라 말하고 싶다. 한번만 얼음장 밑 수정 같은 맑은 물에 몸 담그기를 말하고 싶다. 당장이라도 얼어 죽을 것 같지만 한겨울에 맛보는 얼음장 밑 수온은 생각보다 따듯하다. 얼음을 깨고서 냉수욕을 즐겨본 사람은 안다. 그 물속에도 온기가 있음을.
운길산 수종사에서 예봉산으로 이어지는 대 여섯 시간의 산행이 힘겹고 지치고 때론 무서움도 느꼈을 쉰마님에게 박수를 보내며 얼음장 밑 물속에도 늘 변함없이 나름의 온기가 있음을 .....그 온기를 느끼는 시간을 끝내 맞이하시기를 부탁드리고 싶다. 오백년을 훌쩍 넘어버린 수종사 해탈문 앞의 은행나무는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청춘이다. 왜냐하면 도전하고 스스로 깨어남을 멈추지 않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