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가에 안전화를 잠시 벗어 뒀다. 허리를 푹 꺾어 낮고 좁은 천막 안으로 안 아무개씨가 들어섰다. 기름때 묻어 지저분한 회색 작업복 가슴 왼쪽에 ‘한진중공업’ 글자가 시퍼렇게 새겨져 있었다. 오전 내 안전화 속에 갇혀 있던 안씨의 발에서 나는 땀냄새가 천막 안에 진동했다. 장갑을 끼고 일해도 잘 씻어지지 않아 늘 시커먼 안씨의 손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덥석 잡아들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심더” 무던한 목소리의 경상도 남자 안씨 역시 강파른 김진숙씨의 손을 놓지 못했다. 안씨는 점심시간마다 김씨가 단식 중인 천막을 들른다. 머무는 시간은 5분 남짓. 그러나 김씨는 “마치 상사병을 앓던 사람이 연인을 만난 듯 동지들을 보면 힘을 얻는다”라고 말했다. 벌써 24년째 한진중공업 ‘해고자’ 신분인 김진숙씨는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이 저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다”라고 고백했다.
혈혈단신, 단식으로 맞선 ‘정리해고’
2월2일 오후, 부산 영도구 봉래동 한진중공업 앞 천막. 천막 입구에 적힌 ‘해고는 연쇄살인이다! 단식 21일’이라는 글자가 적힌 종이가 겨울바람에 위태롭게 나부꼈다. 한진중공업은 350여명이 넘는 희망퇴직 명단을 이미 손에 쥐고서도 ‘30% 구조조정’을 말하고 있었다. 회사는 2월2일 오후, 교섭 중에는 미루기로 했던 정리해고 신고서를 노동부에 제출했다고 했다. 회사가 352명을 대상으로 한 정리해고 신고서에는 “정리해고 시한을 3월5일로 잡고 있으나, ‘즉시’도 가능하다”라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직원이 아닌 한진중공업 내 하청노동자들은 그 수를 채 헤아리기도 전에 모습을 보이지 않기 일쑤다. 통근버스 안 매일 같이 조금씩 ‘사라지는’ 아저씨들을 확인하면서 김진숙씨는 곡기를 끊었다. 어느덧 21일을 넘겼다. 정리해고 신고서가 제출됐으니 김씨의 단식은 이제 정말 멈출 수 없는 일이 됐다.
천막 옆 6차선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위협적인 굉음은 자동차가 몸 위를 지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왔다. 때때로 자동차 소음에 묻히는 김진숙씨의 힘없는 목소리는 “천막 안에 누워 ‘로드킬’을 떠올린다”라고 말했다. 전날 천막 안에 들렀던 어떤 이는 “차 소리에 마음이 쓰여 집에 가는 길에 문구점에 들러 샀다”라며 수험생들이 즐겨 쓴다는 ‘고성능’ 귀마개를 놓고 갔다. 김씨는 요즘 읽고 있다는 <서준식의 옥중서한>을 뒤적이며 “여기가 감옥보다 더 열악하다. 감옥은 이렇게 시끄럽지 않잖나”라며 소리 없이 웃었다.
세 사람이 무릎을 마주대고 앉으면 가득 차는 좁은 공간. 김진숙씨의 낭창낭창한 몸은 마냥 위태로워 보였다. 63끼를 굶는 동안 몸무게는 10kg이 줄어들었다. 갈라진 마른 입술, 황달로 누런 김씨의 얼굴을 마주하니, 밤마다 천막을 찾아와 불콰하게 취한 목소리로 “단식을 풀라”며 눈물을 쏟는다던 ‘다 큰 남자들’이 이해됐다. 차마 천막을 열지 못했던 절절한 마음들은 글자로 남았다. 아침에 눈 뜨고 천막을 열면, 절절한 마음으로 손글씨로 적어 내린 편지가 놓여져 있었다.
“몇 번이나 단식농성장 천막 앞을 서성거렸습니다. 뭘 어찌해야 할 지 몰라 동지를 찾지 못했습니다. 지도위원님이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서 마지막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다며 단식을 선언하셨을 때, 저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동지의 유서였기 때문입니다. (중략) 한진중공업의 노동자들은 당신이 필요합니다. 한진중공업의 노동자들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1월28일 한진중공업 권 아무개 조합원)”
“선생님 덕분에 세상을 알게 되고,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이렇게 건강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학생이, 선생님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다는,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그 마음을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선생님께 단식 그만하시라고, 건강 챙기셔야 한다고, 제발. 단식을 그만 푸시라는 얘기를 꼭 하지 않으면 마음이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2월1일 박 아무개 대학생)”
한진중공업의 산 증인
한진중공업 민주노조의 역사는 김진숙씨의 삶과 그 궤를 같이 한다. 1981년, 가난이 지겨웠던 스무살의 김진숙씨는 미혼여성으로는 최초로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의 용접공이 됐다. 입사하고 5년은 지각 한 번 안하고 잔업과 휴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철판에 깔려 오른쪽 다리가 성치 못했어도, “참 사는 것 같았다”라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쥐가 우글거리는 현장에서 새까만 꽁보리밥을 냄새 나는 공업용수에 말아 후루룩 삼키던 현실을 바꿔 보려고 도시락 거부 투쟁을 시도했다. 사흘만에 상여금 100% 지급과 식당을 지어주겠다는 사장 명의의 대자보가 붙었다. 수천명의 노동자가 한 화장실을 쓰거나, 회사 신협에 10원씩만 저축하는 ‘즐거운 투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1986년 2월18일 노조 대의원이 된 김진숙씨는 어용노조의 비리를 폭로한 대가로 1986년 7월14일 해고됐다. 대신, 한진중공업 노조는 어용이 아닌 민주노조로 부산지역 노동운동의 ‘거점’이 됐다.
다시 돌아가고 싶어 산복도로 위에서 수천번도 더 내려다 본 한진중공업 공장. 지난해 11월 김진숙씨는 24년만에 민주화운동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부당해고 결정을 받았다. 그러나 법적 구속력이 없는 권고 결정에 불과했다. 김씨는 “단 하루를 일하더라도 내 손으로 사표를 쓰고 나오고 싶다”라는 심정으로 매일 아침 회사 앞으로 나가 출근시위를 시작했지만, 이내 복직보다 더 긴히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직원 1000여명을 구조조정 하겠다는 한진중공업의 결정. 정리해고 명단이 발표되면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은 ‘산자’와 ‘죽은자’로 갈라질 것이다. 김진숙씨는 그 일을 가장 우려하고 있었다. 기시감 때문이었다.
2003년이 반복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
김진숙씨는 2003년 끝내 죽음을 선택한 김주익씨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당시 한진중공업 노조 지회장이던 김주익씨는 2003년 10월 한진중공업 내 높이 35m의 크레인 위에서 회사의 구조조정안에 반대하며 129일간 버티다 제 손으로 목숨을 끊었다. 그때도 회사는 650명을 해고했다. 김주익씨는 산자와 죽은자로 갈라선 노동자들이 끝까지 싸워주길 바란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크레인에서 내려오지 않겠다던 김주익의 시신은 그러고도 한동안 크레인에 머물렀다.
그리고 채 보름이 못 돼 또 한 사람이 제 손으로 목숨을 끊었다. ‘내가 김주익을 죽였다’라며 10m 아래 도크에 몸을 던진 ‘산자’ 곽재규씨의 죽음이었다. 35m 높이의 크레인에서 김주익의 관이 내려오고, 10m 아래 도크에서 곽재규의 관이 올라오는 기막힌 풍경이 연출됐다. 2003년의 싸움은 그제서야 끝났다. 회사는 이들의 추모공원을 만들었다. 노조 건물을 세워주는 한편, 30억을 들여 식당도 새로 지어줬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에게 깊이 새겨진 2003년의 상흔은 그렇게 치유되는 듯 했지만 2010년 겨울 세밑에 또다시 반복되고 있었다. 김진숙씨는 “김주익의 절망감의 표현이 35m 높이의 크레인이었듯이, 지금 내가 절망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단식 뿐이다”라고 말했다.
정리해고 신고서가 제출된 2월2일, 한진중공업 노조는 2월3일~5일 전면파업을 선언했다. 김씨의 말대로 "불매운동도 할 수 없는" 한진중공업이 만드는 배는 그렇게 누군가의 핏값으로, 또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한 채 오늘도 만들어지고 있다.

『소금꽃 나무』는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실제 모습을 보여 주는 사회비평에세이로, 민주화 뒤에 숨겨진 어두운 모습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인간애를 잔잔히 그려냈다. 권위주의, 민주화, 세계화로 이어지는 공식 역사의 이면에서, 고단한 노동의 현실을 당차게 감당해 낸 여성 노동자 김진숙의 삶과 투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저자 김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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