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엽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 소장이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다. 최 소장은 권영길 원내대표 등과 함께 민주노동당 창당에 나섰던 1세대 당원이다. 최 소장은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전주고-고려대를 나왔고,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될 때까지 노동운동과 재야운동에 몸을 담았다.
- 전주고등학교 시절부터 운동권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 고등학교 다닐 때 유신 시절이었는데, 유신 헌법을 반대하는 학생운동을 했다. 데모하려고 고대 갔고.(웃음) 그 때 고대가 아주 셌다. 대학가는 목적이 유신헌법을 철폐시키기 위해서였다. 4·19 혁명처럼 해야 유신헌법을 철폐시키고 박정희를 심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일념으로 고대를 갔다.(웃음) 대학에서 제적 두 번 당하고, 농촌생활 공장생활 다 해봤으니 무척 신나게 산거다.
- 박정희가 죽었던 1979년 10월 26일에는 아주 기뻤겠다.
= 그 때는 제적당해서 공장에 있었다. 당시만 해도 위장취업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이라 대학 간 이야기만 빼고 내 이름으로 취업했다. 대우중공업이었는데, 그 때 사장이 군인 출신이라 박정희 묘소에 참배를 가더라. 박정희가 죽고 나서 전두환이 들어오려고 하는데, 감정이 묘했다. 마음도 급하고 해서 뭔가 하려면 학생운동을 더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단 복학을 했다.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를 선언한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 최규엽 소장 ⓒ민중의소리
- 5.18 유공자가 된 것이 그 때 일 때문인가?
= 당시에 학생운동보다 노동자들 속으로 들어가자는 바람이 불었다. 나는 그런 주장에 공감했지만 그래도 학생운동을 하지 말자는 데는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학교로 돌아가서 복학생들 중에서 데모 안하는 사람들 찾아 데모하자고 선동을 했다. 광주항쟁 일어나고 나서 모든 대학이 휴교를 했다가 2학기 때 개강을 했다. 곧바로 데모를 했고 수배를 당했다. 몇 달 피신하다가 다시 공장으로 갔다. 밥솥 만드는 회사였는데 노동자들이 4백50명쯤 됐다. 학출로 들어가 노조 만드는 데 성공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감옥 가서 2년 살았다.
- 현장, 감옥, 현장, 감옥을 반복한 셈이다.
= 감옥 갔다 왔더니 그 때부터는 내 이름으로는 취직이 안돼서 주민증을 위조했다. 동일제강에 입사를 했는데, 거기서 박영진 열사를 만났다. 노동운동 다시 배웠지. 그 공장에 학생 출신 활동가만 8명이 있었다. 12시간 맞교대로 일하는데, 정말 힘들었다. 9시에 퇴근하고 나서 노동자들이랑 막걸리라도 한 잔 하려면 서서 먹었다. 훌쩍 마시고 가는 거지. 그 와중에도 노조를 만들었는데, 나중에 보니 영등포 일대 사장들이 나 보고 ‘노조 제조기’라고 불렀더라.
- 계속 노동운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같이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 중에는 민주당으로 옮겨서 국회의원을 한 경우도 있는데.
= 1987년에 다시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갔다 왔고, 그 이후에 한겨레사회연구소 거쳐서 서울 노동운동 연구소 소장, 전국연합 정책위원장을 했다. 한 10년 그렇게 있었는데 결국 노동자, 농민, 서민을 위한 정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전국연합에서는 김대중을 비판적으로 지지하자는 의견이 더 많았었다. 결국 1997년에 권영길 후보를 냈으니 성공한 셈이다. 1997년 대선 끝나고 13명이 민주노동당을 만들기 위해 국민승리21이라는 정치조직을 만들었는데, 그 때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대표는 권영길 원내대표였고. 우리 당 당원들 중에는 20년 넘게 노동운동을 하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러브콜’을 받은 사람들 많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사람들이 지금 민주노동당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 국회의원 선거에서 3번 낙선했다.
= 지금은 약간 다르지만, 민주노동당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것은 당을 알리는 일이었다. 세 번 낙선했으니 서울에서는 제일 많이 출마하고 떨어진 사람이 된다.(웃음) 국민승리21 시절이 IMF 때인데 노숙자가 처음 생길 때다. 서울역에서 같이 노숙하면서 실업자 운동의 첫 삽을 뗐다. 이 국민승리21이 2000년에 민주노동당으로 발전하면서 중앙당에서 나와서 지역으로 갔다. 구로, 영등포, 광명을 합쳐서 민주노동당 서울 남부지부를 만들었는데 이게 지구당 1호였다. 그 때 우리는 일정한 당원 숫자가 되기 전까지는 지구당을 만들지 않았다. 대중적 토대가 없이 지붕만 만들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민주노동당의 주장은 이미 시민에게 검증이 됐다”
최 소장의 서울시장 출마는 처음이다. 다른 당과 마찬가지로 오세훈 시장의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 강행과 패배에 이은 사퇴로 서울시장 선거는 급하게 준비됐다. 무상급식의 원 저작권자는 민주노동당이니 느끼는 바가 각별할 수밖에 없다.
- 무상급식은 민주노동당이 제안한 일이다. 그걸 막기 위해 오 시장이 무리수를 두다가 결국 사퇴했다.
= 지금 대세가 된 보편적 복지의 ‘원조’라고 할까(웃음) 금천지역 위원장하면서 친환경 무상급식 조례를 추진했고 구민 6천명의 서명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러니까 이번에 주민투표를 통해서 민주노동당의 주장은 이미 서울시민에게 검증이 된 것이다. 자신 있게 출마를 결심했다. 친환경 무상급식은 물론이고, 보육 노인 일자리 의료 교육문제에 대해 민주노동당은 모든 대안이 준비되어 있다. 사실 무상급식은 보편적 복지의 초보적 단계일 뿐이다. 한나라당과 오세훈 시장은 이 초보적 단계도 싫다는 것인데, 시대를 거꾸로 사는 셈이다.
- 민주노동당 후보가 서울시장이 된다는 것은 아직 상상하기 힘들다.
= 민주노동당이 배출한 구청장들이 있다. 정말 잘 한다. 서울시민들도 이런 걸 볼 수 있다. 보편적 복지는 훌륭한 시장이 잘 해서 되는 게 아니다. 복지를 누려야 할 서민들, 서울시민들이 스스로 깨우치고 스스로 단결해서 쟁취해야 한다. 시민에게 권력이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건 헌법에도 나와 있다. 그런데 지금은 권력이 대통령에게서, 재벌에게서, 투기 자본에게서 나온다.
- 시민에게 권력을 준다는 것은 원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 참여예산제, 시민감사관제, 시민배심원제. 이런 게 많이 있다. 서울시 기금이 15조쯤 되는데 시민은 기금관리위원회에 참여하지 못한다. 시민이 권력을 가질 수 있다. 왜 안되나.
- 그래도 아직까지는 민주노동당이 단독으로 하기보다 야권과 함께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 잘 알고 있고 그렇게 할 거다. 야권연대 한다. 반드시 한다. 그러나 안철수 돌풍같은 걸 보면 시민들이 기존 정당들에 대해 너무 실망했고, 민중을 사랑하는 정치인들을 찾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많은 핵심 활동가들, 정치인들이야 말로 서울시민들이 찾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잘 사는 사람들은 서울시가 도와주지 않아도 잘 산다”
- 박원순 변호사가 무소속으로 출마한 상태다. 어떻게 평가하나.
=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민주노동당에서 함께 일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박 변호사가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지지율 1위를 달리면서 정당 정치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이 늘어났다. 그러나 정당이 민중의 여론을 수렴하고 집행하는 데서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임에는 분명하다. 물론 무소속으로 지방선거에서 당선되고 시정을 훌륭하게 이끈 사례는 있다. 정당이 제 역할을 못하면 그렇게 된다.
- 단일화는 어떤 방법으로 되어야 한다고 보나.
= 나는 마음을 비우고 있다. 다만 미디어 정치에 너무 끌려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야당과 박원순 변호사측이 모여서 협의를 하고 있는데, 여론조사 50% 국민참여경선 50%가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솔직히 나는 민중참여경선했으면 좋겠다. 봉급생활자, 자영업자, 학생, 주부 등 일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직업분표별로 선거인단 구성했으면 한다. 잘 사는 사람들은 서울시가 도와주지 않아도 잘 산다. 서울시가 중점적으로 보호하고 도와야 할 사람들이 후보를 뽑을 때부터 더 많은 권한을 가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