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생각과 인문학적 삶>이라는 제목으로 만난 김경윤 작가
이 강의를 듣고 난 다음 사람들의 표정에 드리워진 미소들... ㅋㅋㅋ
즐거운 웃음 빵 터지는 소리가 가득한 강의였습니다.
시작은 아이들 마음으로 돌아가기 난센스 퀴즈. 여러분이 맞춰 보시길^^
첫째 문제는 사자로 국을 끓이면?
둘째 문제는 제시카 알바가 열심히 일을 하면 무엇이 될까?
셋째 문제는 백 곱하기 백 곱하기는?
넷째 문제는 듣기만 해도 무섭고 잔인한 밥은?
이 문제에서 인디언밥, 고래밥, 주먹밥 등 했다가 야단 맞았다. ㅋㅋ아 그런데 답은 정말 무섭다.
이렇게 시작한 강의는 끝날 때까지도 웃음 폭탄이 투척되는 강의였다.
이제 본론으로...

인문학은 사람의 무늬(결)을 연구하는 학문
인문학을 사람들은 역사 문학 철학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런데 나는 김영민 교수가 말씀하신 인문학이 사람의 무늬와 관련된 학문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사람의 무늬는 사람의 결과 같은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결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을 감지할 수 있다.
마치 살결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의 우여곡절을 알 수 있듯이.
숨결 역시 그러하다. 운동을 하거나 흥분하면 가빠지고 마음이 조용하면 숨결도 고요하다.
연인들 사이도 숨결을 잘 살펴야 할 짓 안 할 짓을 구분해서 할 수 있다.^^
(이때 말단소총수 님 한 말씀... 전 조금만 힘들어도 숨결이 가뿐데...ㅋㅋㅋ 이말에 사람들이 또 웃었다. 그래서요? 라는 질문도 나왔다는...)
마음결도 곱다 곱지 않다라고 말한다.
결을 보는 것은 그 사람을 보는 것이고 그 사람의 삶을 보는 것이다.
문학은 감성의 결, 철학은 생각을 결, 역사는 삶의 결을 기록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문학을 지식과 교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문학은 다른 사람의 결을 통해 나의 결을 보는 것이다.
즉 남을 통해 나를 보는 것이다.
인문학은 자기로 돌아와서 자신의 결을 보지 못하면 실패한 것이다.
인문학은 성공을 하기 위한 학문이 아니다. 성찰을 위한 학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인문학이 붐을 일으킨 몇 가지 예가 있다.
빌 게이트가 자신이 성공한 것은 인문학과 동네 도서관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무렵 동네도서관이 난리가 났다.
물론 동네도서관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피크는 딱 한 달뿐이기는 했다.
잡스가 스마트폰을 만든 것은 인문학 때문이라는 말을 해서 다시 인문학이 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리딩으로 리더하라>는 책이 인문학을 일으키는 데 한몫을 한 책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고 두려워졌다. 여기서 하라는 대로 하면 죽겠구나. 리더(지배자)가 되고 싶으면 어려운 공부를 하라는 것이다. 이는 지배자의 뇌구조를 만들게 하는 것이다. 그 책에는 중1에게 권하는 추천도서가 '성학집요'다. '성학집요'를 엄마가 먼저 읽었다면 엄마가 미쳤을 것이고 아이가 읽었다면 아이가 미쳤을 것이다. 어려운 책이다. 이 책은 인문학은 성공이라는 코드의 책이다. 자식을 성공시키고자 하는 부모들의 강한 열망을 인문학에 주입시킨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의 대가를 보면 성공과는 관련이 없다.
부처의 예를 보자.
부처는 사람의 고통, 아픔, 죽음을 보고 경악하였다. 보통 사람들도 다 겪는 일인데 부처는 고민을 하였다. 이것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다. 편히 살 수 있는데 그는 모든 것을 버렸다. 왕의 자리도 버렸고 결혼까지 했는데 가정조차도 버렸다. 시쳇말로 또라이다^^
소크라테스 역시 돈도 안 받고 강의를 했다. 어느 아내가 좋아하겠는가? 그는 가르친 것이 없다고 돈도 안 받고 떠들다가 결국 사약을 먹고 죽었다
예수의 삶은 어떠한가? 떠돌아다니다가(민폐라고 표현^^) 십자가형을 받았다.
그리고 공자는? 귀족에게 개기다가^^ 쫓겨났다. 진나라에서 길을 잃었을 때 공자를 본 사람이 그를 상갓집 개와 같다는 표현을 하였다.
이렇게 4대 성인의 삶은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성공과는 관련이 없다.
그들이 위대한 것은 인간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짜일까?" 결론은 "모른다"이다.
부처는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결론은 "나를 없애면 된다."이다.
예수는 "가난과 질병은 죄인가?" 답은 "아니다"이다 예수는 가난과 질병은 죄가 아니고 누구나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이다.
성경을 해석해 보면 예수는 유머러스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
성경에 나오는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내밀어라' '오리는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라.'는 말을 목사님들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저항하지 말라고 해석하고 가르치신다.
그러나 이를 달리 해석해 보면 일종의 저항방식이다.
사람의 뺨을 때리면 보통 오른손으로 때리게 되고 그러면 상대편이 맞는 뺨은 왼쪽이다. 즉 제대로 뺨을 맞게 되면 왼쪽 뺨을 맞게 된다. 오른쪽 뺨을 때리려면 손등으로 때려야 한다. 당시 손등으로 때리는 대상은 노예 등이다. 즉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왼쪽 뺨을 내민다는 것은 나는 노예가 아니다. 제대로 때려라. 인간 대접을 하라는 저항이다.
'오 리는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당시 법은 식민지 백성을 차출해서 강제로 데리고 가는 것은 5리 까지 가능하였다. 5리 이상 데리고 가게 되면 법으로 제한을 하였다. 5리 이상부터는 자유 의지로 가는 것이다. 스스로 자유인임을 선포하는 것이기도 하고 5리 이상부터는 처벌의 대상이 되는 군인에게는 오히려 부담이 되는 일이기도 하였다. 갑과 을이 바뀌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겉옷을 뺏아가면 속옷도 주어라' ' 99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소중하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도 색다른 해석을... (다 적지 않겠습니다. 강의 들으신 분들의 폭풍 댓글로 해석 부탁^^)
공자의 질문은 "인간은 어떻게 하면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이다 이에 대해 병가나 법가는 폭력에 상응하는 폭력, 일벌백계를 말했지만 공자는 폭력에 폭력을 만드는 것은 야만이라고 하였다. 다스리는 자는 사랑과 정의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다. 즉 예(禮)로서 다스리는 매너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유교가 어떻게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나도 말씀....)
이상에서 말했듯이 성인의 삶은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즉 인문학은 성공을 다루지 않는다. 인문학은 성찰을 다룬다. 자신을 바라보고 인생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의 목표는 '나의 나' 되기이다. 즉 긍정의 긍정으로 나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는 한 인문학은 사치에 불과하다.
결국 인문학은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나답게 사는 길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누구의 삶도 아닌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대체할 수 있는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서 - 성숙하고 성찰하라
학교는 대체가능한 인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대체 가능한 삶이란 교환이 가능한 삶으로 사람이 도구화가 되는 일이다.
재능을 죽이고 인간을 표준화시키고 있다. 수업 시간을 보면 알 수 있다. 초등학교는 40분 수업을 하고 쉬고 중학교는 45분 고등학교는 50분 수업을 하고 쉰다. 국어가 끝나고 수학 시간이 되면 내가 아무리 국어를 하고 싶어도 수학을 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욕망을 끊어야 한다. 싫은 것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하루 8시간의 수업은 바로 노동 가능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지배자의 임무다.
농성을 하는 것은 나는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인간이다. 나에게는 고유한 삶이 있다. 나에게 무슨 짓을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노예는 선택하지 않는다. 명령을 따르는 자다. 자유인은 선택을 하는 자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진다. 나의 고유한 삶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이게 나야라는 대답을 얻으면 인문학은 대박이다. 그렇다고 그 삶이 세속적 성공을 보장할 확률은 거의 없다. 엿같이 될 가능성이 99.9%다.
우리나라 40, 50대는 대충해도 되었다. 공부도 대충해도 대학을 들어갔고 대학에서 대충해도 취직을 하였다. 그것은 자본주의 상승 시기였기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자본주의 하강시대다. 성공 확률은 낮아졌다. 지금은 생존의 시대다.
내가 내 삶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해 행복해 하는 것이 성숙이다. 성숙과 성찰은 성공에 대체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면이다.
인문학적 글쓰기는 자신을 확장하는 즐거움이 있다.
나이가 들면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질이 문제다. 나이가 들어서는 책을 많이 읽기보다 자신의 인생을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젊은 날에는 지식과 친구가 다 많이 필요하다. 즉 양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내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이 가당치 않다. 친구도 부르면 달려올 친구가 별로 없다. 지금은 알고 있는 것을 지워나가야 한다.
인문학은 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을 기록할 수 있는 책 한 권을 쓴다면 그 책 한 권에 담길 수 있는 내용은 뭘까를 고민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적 삶을 사는 것이다.
글을 쓰면 정확히 알게 되는 것이, 내가 뭘 모르는지를 알게 된다. 글 쓰는 행위는 자신의 삶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자신을 소재로 하면 쓸 것이 별로 없다. 나와 비교되는 무엇인가를 통해 글을 쓰면 자신을 확장하는 즐거움이 있다. 글 쓰는 일은 사랑과 비슷하다. 자신의 바깥쪽의 것이 보이면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이해 불가능한 인생의 갈등과 긴장 관계를 해결하고 더 멋진 관계를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고사성어를 보자.
주인이 원숭이에게 아침에는 3개 저녁에는 4개를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가 화를 낸다. 그러자 주인이 아침에는 4개 저녁에는 3개라고 하자 원숭이들이 좋아한다.
우리는 흔히 이 고사성어를 간교한 말로써 사람을 희롱하는 것이라 배운다. 그러나 달리 보게 되면 이것은 갈등 관계의 해결이다.
이 고사성어 속의 주인은 원숭이가 화를 낸다는 것을 본다. 그 사실을 자신의 감정을 넣지 않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원숭이에게 줄 수 있는 능력이 먹이 7개임을 알고 제안을 다시 하게 한다
주인의 시선이 그 원숭이를 이해불가능의 존재로 보게 되면 원숭이를 패든가 죽이든가 무시할 것이다. 즉 테두리 안으로 집어넣든가 배척하든가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고사성어의 주인은 원숭이(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장자의 말에 인시(因是) 천균(天鈞) 양행(兩行)이라는 말이 있다.
인시(因是)는 사물의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감정이나 주관의 개입이 없이.
천균(天鈞)은 하늘의 저울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다. 즉 평등하게 사물을 보는 것이다. (사전적인 뜻은 옳은 것을 그른 것을 아울러 한 가지로 보는 것으로 나와 있다.)
양행(兩行)은 나의 길만 걷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과 함께 걷는 것이다.
조삼모사에 이 말을 적용시키면
원숭이가 화를 낸 것을 주인은 자신의 주관적 판단을 멈추고 인정하는 것이다. 즉 상대편을 인정하는 인시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새로운 제안을 통해 균형을 잡는 것이다. 그것이 천균이다.(나의 생각은...이런 것을 협상과 설득이라고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양행은 인시와 천균을 함께 하는 것이다. 상대와 나를 함께 보는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과 원숭이가 함께 가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가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로 바뀌는 것이다.
주체와 타자의 소통이다.
이해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은 대처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2008년 촛불의 경우 어느 날 여중생이 촛불을 들고 쇠고기 수입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
예전에 데모대는 예측가능하고 이해 가능한 시위였다. 시위대와 전경들이 밀고 당기는 패턴이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촛불들은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보통은 시위대가 바라케이트를 치는데 권력자가 바리케이드를 쳤다. 그것이 명박산성이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접근 방법 중 정치학적인 접근방법은 일종의 거대담론이다. 인문학은 자신의 삶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자신의 삶을 잘 감당해 낼 수 있는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인문학의 핵심이다. 세상을 바꾸기 이전에 나를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지옥에 있어도 살아갈 수 있다. 우리의 현실 이 사회는 지옥과 같은 삶이다. 담대하게 견뎌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성찰해야 한다. 춘추전국 시대 양주가 한 말 경물중생(輕物重生)이 바로 인문학과 연관이 있다. 경물(輕物)은 외부적 환경이라고 볼 수 있다. 중생(重生)은 중요한 삶을 말한다. 즉 돈, 지위, 명예 등 나에게 쏟아지는 유혹에 흔들리지 마라 너의 목숨은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해 불가능한 것을 만나는 것은 신을 만나는 듯한 경악이다.
대부분의 삶은 이해 불가능하다.
인간에게 있어 애인도 타자(他者)다.
시민광장의 경우도 시민광장이라는 큰 틀은 동일인(the same)이다. 그러나 시민광장 안의 각 개인은 타자(the other)다.
이해 불가능한 타자와의 갈등, 긴장을 얼마나 버텨낼 수 있는가가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더 멋지게 관계를 만들 수 있는가가 바로 인문학의 한 목표다.
정치 역시 정파가 아니라 삶으로 모이는 정치가 만들어져야 한다.
여기까지가 본론의 내용이었다.
말씀하시고 나서 하고 싶은 이야기의 1/3만 하셨다고 ... 앞으로 최소한 강의를 2번은 더 들어야 할 것 같다.
정말 웃겼는데 글을 쓰니 안 웃기네요 ㅠㅠ 중간에 삐리리 넣어야할 단어들도 불쑥불쑥 튀어나왔는데 차마 못 적었다는...ㅋㅋㅋ 그리고 자주자주 웃음이 빵빵빵 터졌는데 음.. 제 글의 한계인지... 글로는 도저히 그 분위기가 표현이 안 됩니다. 역시 현장의 중요성이...이럴 때 쓰고 싶은 웃음 퀴즈는 제빵왕이 싫어하는 개그가 빵터지는 개그라고 ... ㅋㅋㅋ 제빵왕이 싫어할 빵빵 터지는 강의였습니다.
질문도 많이 나왔는데
제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과 또 하나만 살짝 적는 것으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낙타' '사자' '어린이'가 뜻하는 것은
'낙타'는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묵묵히 지고 것으로 순응적인 삶을 말하는 것으로 부정의 긍정이라면 '사자'는 부정적인 사태에 저항하는 것으로 피튀기는 삶을 통해 자유를 시작하는 것이나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는 부정의 부정이라면 '어린아이'는 자유로운 삶을 말한다. 승패와 상관없이 삶을 즐기는 것이다. 바로 긍정의 긍정이다.
복음서 '오병이어'의 기적의 다른 해석은 어떤 것인가요?
오병이어에서 한 어린이가 자신이 가진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생선을 내어놓는 것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은 실제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어른들은 눈치를 보느라 먹을 것을 가져 온 것을 내어놓지 않았다면 어린이는 그런 눈치 없이 같이 나누어 먹자고 자신이 먹을 것이 꺼낸 것이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어른들도 자신들이 가져온 것을 여기저기 꺼내면서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 먹었다고 보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첫 마음이 세상을 바꾼 것이다. 부족하지만 자신의 것을 내어 놓으면 다른 사람도 내어 놓는다. 이것이 나눔과 연대의 정신이다.
어느 분인가가 강사님께 앞으로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 물었을 때 대답이 무엇이었을까요? 아.. 정말 독특하신 강사님이셨습니다. 차마 쓸 수가... ㅠㅠ 그래도 써 보겠다. 노숙자가 꿈이시라고...ㅋㅋㅋ ㅠㅠ
항상 그러하지만 오늘도 참 부족한 강의 후기입니다.
강사님의 뜻이 그 결이 백분의 일도 전달되지 못한 이 느낌.... 저의 부족함...
저 말고도 또 다른 분들의 강의 후기도 쏟아져 나오길 기대하며 졸필은 여기서.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뜻은 세상과 화합하여 자신이 다름을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줄이면 잘난 척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