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서른 즈음에 연극배우 명계남은 많은 청춘들에게 우상이었다. 선무당 작가 시절, 희곡을 쓴답시고 대학로를 기웃거리다가 모노극 <콘트라베이스>를 관람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그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혼신의 열정으로 두시간이 넘는 모노극을 펼치던 그의 모습은 연극이 끝나고 콘트라베이스의 내용보다는 그가 흘린 땀과 열정이라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에는 근접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명배우였다.나는 호시탐탐 그의 동정을 살폈고 마침내 기회가 왔다.
mbc-tv에서 <고향길 문화기행>이라는 다큐 프로그램을 편성했는데 내게 한달에 두편의 작품이 할당 되었다.6개월 동안 12명의 명사들과 함께 고향에 가서 일주일 동안 생활해가며 프로그램을 만들고 방송 하는 것이다.나는 PD와 의논해서 이철,안숙선,전상국,민용태,이현세,명계남을 출연 대상으로 하고 연락을 취했다.
"명선생님 고향이 어디세요?"
"어, 나는 개성이야. 이북이라 갈 수 없잖아"
첫 통화는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다.아무리 생각해도 시청율을 위해서도 출연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동료 작가에게서 지혜가 나왔다.
'젖먹이 갓난아기 1.4 후퇴 때 남으로 내려왔다는데 내려와서 정착한 곳이 고향 아니겠어?'
나는 교양제작국과 편성국에 <고향>의 의미를 설득하고 마침내 기회를 살려냈다. 그런데 일정상 당시 제작하고 있던 영화 <초록물고기>가 발목을 잡았다.영화에서 명선생의 출연 비중이 높아 따로 시간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명선생과 출연 합의는 해 놓고도 시간을 못 내서 제작을 못하게 되는 상황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12명중에 벌써 7명의 제작과 방송이 진행 되었고, 방송이 나가다보니 여기저기서 출연 요청도 들어오던 때라 차츰 아쉬운 생각이 들 때였다.그러던 11월 초, 시간을 낼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곧바로 공주로 내려갔다. 공산성, 신라 사진관, 갑사, 곰나루터...... 일주일 동안 공주 어는 한 곳에 숙소를 정해 두고 그렇게 <고향길 문화기행-명계남 편>은 제작 방송 되었다.
백제시대 토성인 공산성의 이불만한 낙엽, 갑사 입구 좌판을 펼친 아낙들의 군밤, 갑사 달마스님과 땄던 홍시. 민속학자 심우송선생과 민속 박물관,공주박물관....... 이창동 감독, 문성근 대표와의 인연도 명선생 때문이었다. 이 분들이 훗날 유시민대표와 함께 한국사에 위대한 자취를 남긴건 다들 아시리라.
세월이 근 이십여년이 흘렀다. 그동안 명선생은 노사모를 만들고, 개혁당, 열린우리당 전해지는 소식은 정치인에 대한 이아기들이었다.나는 작가 생활도 접고, 나 살기 위한 이기심 때문에 더 이상 연락을 하거나 어느 모임에서 만나지도 않았다.그런 내가 첨맘님을 위해 나서고 참여당 발기인이 되고,시민광장 대표를 하고......
작년 대선 때 광화문에서 명선생을 다시 만났다.
"어어어 누구야, 덕섭이"
하시면서 와락 껴안으셨다. 그렇게 해후를 했다. 옆에서 박무님이
"시민광장 대표예요"
낯 뜨겁게~~
그리고 올 봄 봉하에 추모시화전 설치를 위해 내려갔다. 명선생은 그 날 봉하 시화전 설치를 위해 사다리를 타고, 끈을 동여매고 해 저물도록 설치를 해주셨다. 봉하에서 올라오고 며칠 후 설치한 시화가 맘에 안든다고 손수 재설치를 하기도 했다. 유시민대표의 시 <대답하지 못한 질문> 그 긴 시를 서예로 쓰고, 표구까지 해서 선물했으니 무척 고마울 뿐이다.
가을이 깊어간다. 이번 주 금요일 나는 대학로에 <천안함 랩소디> 연극을 보러간다. 오늘 아침 전화로 '한 열명은 갈 것 같아요' 했더니 '그렇게나 많이 와'
세월이 더 가기 전에 그를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