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글은 문학광장 날적이에서 함께 입력된 조이풀님의 글입니다. |
(두번째 방황이 가르쳐 준 것들-이백만 著, 메디치미디어 刊)
이백만의 캄보디아 인생 피정
-그의 방황을 지켜보는 재미
조덕섭
저자는 스스로 ‘의외의 삶’을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초등학교를 7학년까지 다니고, 중학교를 진도 육지에서 제주도로 진학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신문기자의 길을 선택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홍보수석이라는 특별한 인물이기도 했다. 노무현대통령 서거 이후에는 국민참여당 창당과 함께 정치에 발을 들여 놓았다. 여기까지는 자의와 타의가 혼재 된 의외의 삶이었을테다. 그러나 인생을 리셑(Reset) 하고자 찾아간 캄보디아, 그 결정은 온전한 자의였고, 우리에게는 의외였다. 갈 수 있는 여러 나라 선택지가 있었을텐데 그는 왜 외딴 곳 캄보디아, 그 곳에서도 외딴곳 반티에이 쁘리업 가톨릭 예수회 센터로 갔을까. 나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지 이백만이 캄보디아에는 왜 갔는지 이 책을 숙독하지 않으면 결례일 것 같았다. 그리고 책장을 덮은 지금은 이 조그만 재미와 감동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
불교의 경전은 팔만 사천권이 넘는다고 한다. 대부분 부처님의 구전 가르침을 제자들이 기록으로 남긴 것인데 많은 경전들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로 시작한다.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하다가 이내 깨달음을 얻은 제자들이 경전을 만들어 냈다. 아난이라는 제자에 의해 ‘여시아문’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특별한 문구가 된 듯하다.
이 책 속에 나오는 이백만의 물음표는 몇 개나 될까? 사람은 자신의 생활 환경이 바뀌면 당연히 질문이 많아지게 된다. 아마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그 나라의 지리적, 생태적, 문화적 생경함에서 비롯된 물음들이었테고 이는 생존에 필요한 물음들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여행 정보를 얻으려고 했던 것이 아닌만큼 이러한 질문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이 책의 물음표 중에서 세가지에 주목했다.
“신부님 크메르루주의 일인자였던 폴 포트는 이미 죽고 없지만 2인자였던 키우 삼판이 살아 있어요. 캄보디아 사람들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를 용서하지 못할 거예요. 저 같아도 용서하지 못하겠어요. 만델라라면 용서 했을까요?”
센터 책임자인 오인돈 신부에게 물었다. 이 신부님 얼마나 난처 했을까.
“장애인을 이렇게 고용하는 무슨 특별한 배경이라도 있나요?”
캄보디아에서 나눅스라는 회사를 운영하는 정철상 회장에게 던진 질문이다. 정철상 회장은 장애인도 비장애인 못지 않은 재능이 있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고 이를 회사 경영에 적극 도입하고 있는 기업인이다.
“그렇지만 너무 허전 합니다. 신부님께서 말씀 하신 ‘불타는 떨기’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하나요?”
시하누크빌 8일간의 침묵의 피정에서 영성지도자인 메이스 신부와 나눈 대화의 일부이다. 저자는 8일간의 침묵 피정이 ‘신앙인 이백만’에게 최초의 영적 스케일링이었다면, 7개월 간의 캄보디아 생활은 ‘생활인 이백만’에게 최초의 인생 스케일링이었다고 고백한다.
세가지 유형의 물음표를 내 나름의 잣대를 갖고 소개했다. 처음 것은 인간 본성이고, 두 번째는 사회성이고, 세 번째는 신앙심일 것이다. 이 물음들만 보아도 저자의 관심과 인격을 엿 볼수 있다. 이와 같이 묻고 듣고 하면서 어느덧 그의 방황의 실체가 무엇인지 가늠해 볼 수 있게 된다.
나이 어린 한현배 수사가 스승이었고, 스물 두 살 프랑스 아가씨 마리이가 선배였고, 수도원의 수녀의 기도는 저자의 영혼의 울림이었을테다. 이와 같이 이백만은 들었고,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그의 방황을 지켜 보며
저자가 두 번째 방황이라고 얘기하고 책제를 이렇게 붙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방황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청소년기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명명했던 그 방황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이성에 대한 애뜻한 사랑과 번민, 현실과 이상이 가져오는 괴리감, 지적 호기심, 신체적 변화, 빈부로 인한 불평등한 사회 구조 등이 복합적으로 방황의 이유를 만든다. 방황은 일탈과는 다르게 일정한 기간을 요구하고 평상심이 아닌 돌출된 행동을 요구한다. 가만 생각해 보면 방황이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몇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집을 뛰쳐 나가 풍찬노숙을 하고
둘째, 육신을 괴롭히는 자학을 하고
셋째, 죽어 버릴까 생각도 해 보고
넷째, 믿는 종교 어느 하나라도 붙들고 이 방황을 멈추게 해 달라고 기도 하는 것
대체로 이러한 조건을 갖추었고, 이렇게 했느냐의 기준에 따라 방황이라는 말을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방황은 대체로 청소년기에 누구나 경험해 봄직한 홍역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방황은 이야기가 다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외부의 물리적인 힘이나 자기 자신의 정신적 충격에서 비롯 될 수 있다. 결혼해서 십수년을 살아보니까 결혼 제도 자체가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거나 사회로부터 점차 고립되어 간다는 위기감이 들거나 하면 심난한 방황이 시작 될 수 있다. 이 때의 방황은 그 결과가 너무나 다르게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두 번 째 방황을 한다고 하면 걱정부터 하게 되고 수시로 문자도 보내면서 ‘잘 참아라’는 위안의 말을 하게된다.
사실 방황을 옆에서 지켜 본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한다. 끝낼 수 있으면 그 방황을 대신해 주고 싶은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두 번째 방황을 그다지 말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의 행보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고 또 관심있게 옆에 있어서인지 이 방황을 통해 그가 이르고자 하는 길이 있다면 응원하고 싶었다. 수시로 그의 페이스북을 드나 들었고, 점차 그의 방황을 훔쳐보는 재미가 있었다.(사실 그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내가 올린 글들을 보니 ‘선거 도와 달라’는 얘기만 있어서 조금 멋쩍기는 했다) 평소에 이백만은 위트와 유머가 많고, 나이에 관계없이 툭 던지는 역설적인 질문이 많다. 그의 말투가 고스란히 묻어난 책이라서 그런지 옆에서 듣는 이야기처럼 캄보디아의 고행 생활은 재미가 있었다.
이백만은 두 번째 방황을 통해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신을 치유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그 기술을 우리게 전해 주고 있다. 그의 인생 3라운드, 가톨릭 신앙과 함께 그가 살아가려는 인생 여정에 별 하나쯤 반짝거려 주길 기원한다.